A Historical Story 기황후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고려출신여인
혜종 우카가투 칸 토곤테무르의 3번째 황후인 기황후(普顯淑聖皇后 奇氏)는 원나라의 황제인 혜종의 제2 계후이자 3번째 정실황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시호는 '보현숙성황후'이며, 이는 한자로 표기하면 '普顯淑聖皇后'입니다. 보통 한국에서는 성이 기 씨인 황후를 일반적으로 "기황후"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녀의 성이 '奇氏'이기 때문입니다. 이 황후는 북원 소종 빌레그트 칸 아유시리다라의 어머니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원나라 공녀로 끌려갔지만, 원제국 최초로
이민족출신 황후가 된 기황후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원나라로 가야 했던 고려시대 공녀
기황후는 행주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는 기자오, 외할아버지는 이행검(李行儉)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라비가 5명, 누이가 2명이었으며, 기철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기황후의 고려식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몽골식 이름으로는 "기 설렁 거 올제이 후투그(Gi Solongo Öljei Khutugh, 奇 肅良合 完者 忽都)"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333년에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원나라에 갔는데, 이는 고려 출신 환관인 고용보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고용 보는 기황후를 앞세워서 권력을 얻고자 했고, 혜종은 그녀를 용모가 아름답고 학식이 뛰어난 여성으로 평가하여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권력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A 공녀란?
"공녀"란 고려시대에 궁중에서 뽑힌 여성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공녀는 귀족과 평민을 망라하고 선발되어 원나라 궁중에서 여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원나라, 고려 왕실 내에서의 권력과 영향을 가졌으며, 정사(正司)라 불리는 기관에서 정식으로 뽑혀 여러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귀족 여성들 중에서 공녀로 뽑히는 것은 궁중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된 공녀의 수가 50여 차례에 달한다고 하고 이를 통해 궁중에서의 여성들 간의 경쟁과 권력 구조의 변화가 여러 차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공녀들은 왕실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원나라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궁중 문화와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측면 중 하나입니다. 물론 모든 공녀들이 왕실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원나라에서는 고려에 강제로
공녀를 요구했고 고려인들은 이런 악행을 피하기 위해 딸을 비구니로 만들거나 일찍 결혼시키기도 했습니다. 원나라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매춘부로 끌려가거나 여러 잡일을 하며 노비처럼 부려지기도 했습니다.
황제의 관심과 궁중암투
혜종은 기황후를 총애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고려 대청도라는 곳에 유배되는 기간 동안 고려에 대한 기억이 나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물론 기황후가 혜종의 마음에 드는 언행을 하면서 잘 보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갈수록 혜종의 총애를 받던 기황후는 제1황후 다나시리의 질투에 시달려 괴롭힘을 당하다가 채찍으로 맞고 인두로 지지는 등 고통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다나시리황후의 남매인 텡기스와 다르카이 일파는 모반 혐의로 멸문당하여 다나시리도 황후에서 폐위되고 만 15세의 나이에 독살당했습니다.
혜종은 처음에는 고려 출신인 기 씨를 제1황후로 삼으려 했으나, 실권자인 바얀이 "몽골족이 아닌 여성을 제1황후로 삼을 수 없다"라고 강하게 반대하여 바얀 후투그가 제1황후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기 씨가 혜종의 아들을 출산하면서 바얀이 실각하자, 혜종의 국사 사라판이 기 씨를 제2황후로 책봉하여 황후가 되었습니다. 기황후는 권력을 획득하면서 박부카와 고용보를 이용하여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습니다. 자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환관 고용보를 임명하여 황실의 재정을 장악하며,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받게 하고 여러 여성을 황태자비로 삼았습니다. 또한, 군사권과 정치 자금도 통제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고, 고려 출신 여성인 권 씨와 김 씨를 중요한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고려에 끼친 영향
기황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고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가 원나라에 보내는 공물의 양은 증가했고, 기황후는 고려에 간섭하여 자신과 친정인 행주 기 씨 가문의 이익을 챙기려고 했습니다. 또한, 오라비인 기철을 비롯한 권문세족도 기황후의 영향력으로 온갖 부패를 부리며 고려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로 인해 1356년에는 제31대 공민왕이 병신정변을 일으켜 기철을 비롯한 권문세족을 처형했습니다. 기황후는 이에 분개하여 1363년에 원나라 군대 10,000명을 고려에 보내 침공했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패배했습니다. 또한, 원나라로 끌려간 고려 공녀들이 원나라 정계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기황후는 이들을 선물로 주어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기황후의 통치는 고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영향만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기황후가 황후가 되고 공녀를 더 이상 차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원나라에 보내는 공물의 양이 늘었다고 하지만 이는 역사사료마다 다르고, 오히려 기황후가 황후가 됨으로써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도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기황후가 고려에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내용입니다.
원제국 쇠퇴와 마지막
혜종 시대에는 주원장이 중국 남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1368년 8월에 대도로 북진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대도는 명나라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혜종, 기황후,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대도를 떠나 북쪽 응창부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태자비 권 씨와 김 씨, 그 자식들까지 명군에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기황후는 고려가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응창부조차 명군의 위협을 받아 카라코룸으로 천도한 중 혜종은 1370년에 이질로 붕어하여 사망했습니다. 혜종과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황제로 즉위했지만, 기황후의 이후 운명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도 카라코룸에서 아들의 황제 즉위를 지켜보다가 황태후가 되어 살다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황후는 유언으로 고려 영토에서 장사되기를 바라고 했고, 그녀의 무덤인 기황후릉은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산 145에 위치해 있습니다. 주변에는 기황후와 관련된 인물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의 운명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여러 가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민족출신 최초의 원제국 황후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사료에 많이 남아있지 않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녀에 대한 평판은 더욱 안 좋게 남게 되었습니다. 여성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왜 그토록 부정적으로 바라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에 힘이 없어 공녀로 끌려가서 온갖 수모와 모욕, 육체적인 고통까지 당하면서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모든 탓을 돌릴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머나먼 땅에서 언어도 음식도 맞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최초의 제1황후가 된 기황후. 궁궐 내에서 입지를 확고히 만든 것을 보면 그녀의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 원나라의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야겠습니다. 현대로 와서야 그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행주기 씨가 문에서는 그녀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사도 지내준다고 합니다. 아울러 고려시대에 강제로 끌려가서 머나먼 땅에서 고생했을 고려인들을 기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