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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istorical Story 마리 앙투아네트

규북이 2024. 1. 18. 00:28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게 하세요"

수백 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저 말을 마리앙투아네트가 했던 말이라 믿습니다.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를 먹게 하라"는 이야기가 와전된 것입니다.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프랑스인들은 오스트리아사람인 그녀를 더욱더 증오하게 됩니다. 

오해로 얼룩진 그녀의 생애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자유로운 어린 시절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11월 2일에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15번째 자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하며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음악, 댄스 등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익히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후에 프랑스 왕비로 살면서도 문서 작성 시 맞춤법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는 적국 출신의 왕비로서 불리한 시선을 받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예술적 환경에서 자랐으며 음악과 미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하프 연주에서 소질을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여섯 살의 모차르트가 궁정 음악회에서 넘어지자 일어서게 하며 청혼을 받기도 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그녀는 자매 중에서는 마리아 카롤리나와 가장 친했지만, 다른 자매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위한 정략결혼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자 마리아 테레지아(마리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전통적인 외교 정책을 바꾸어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는 프랑스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등장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왕세손 루이 오귀스트(훗날 루이 16세) 간의 정략결혼을 주선했습니다.

1769년 6월, 루이 15세가 보낸 약혼 문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해지고, 프랑스의 오를레앙 교구 주교 베르몽이 미래 왕비 교육을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1770년 5월 16일, 14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 결혼식을 올려 프랑스의 마담 라 도핀느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습니다. 이 결혼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찬가'가 작곡되어 축복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적자부인이라 불리는 오스트리아 여자

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재정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화려한 로코코 문화에 몰두했습니다. 루이 15세의 애인이었던 뒤바리

백작 부인이 사용한 도자기 찻잔 한 세트에는 엄청난 금액이 소비되었으며, 권력층 전체가 무절제한 사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예술품 수집과 후원으로 현대의 프랑스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만, 당시 왕실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면 이는 국고에 큰 타격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대의 재정적자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무리한 전쟁과 베르사유건축등으로 이미 많은 재정이 고갈된 상태로 후손들에게 대물림 됐기 때문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희고 고운 피부, 탐스러운 머리, 늘씬한 체형으로 유명했으며, 복장과 머리 손질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자란 그녀의 밝은 성격은 그 모든 것들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프랑스유행을 선도함으로써 당시의 왕실 패션을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비의 옷 갈아입기와 화장하는 모습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에는 왕비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매일 북새통이었고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매우 낯선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사소한 작은 언행들마저 적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곱지 못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이는 모후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걱정이었습니다.

여론조작의 시초 목걸이 사건

1785년 목걸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민중의 불신을 더욱 강화시킨 스캔들이었습니다. 라모트 백작부인이 로아이 추기경을 속여 대리구매를 유도하여 왕비 몰래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획득한 것이 사건의 핵심이었습니다. 재판 결과 왕비는 결백했지만, 이미 왕비의 체면과 위신은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목걸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민중의 혐오를 촉발시켰고,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도 헛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궁정 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 한스 액셀 폰 페르센 백작 간의 염문도 확산되었습니다. 게다가 왕비는 소수의 총애를 받는 귀족들을 선호하여 다른 귀족들로부터 악평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베르사유 외의 장소, 특히 파리에서 심각했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프랑스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더 큰 증오로 들끓었습니다.

 

민중의 분노 프랑스혁명

18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최악의 경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물가가 폭등하고, 이로 인해 서민들은 식량에 대한 걱정을 안게 되었습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식사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실업자와 절대 빈곤층이 증가했습니다. 게다가 루이 16세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해서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폭동, 시위, 약탈 등의 사회 불안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고, 루이 16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와 귀족 등은 개혁을 거부하며 사회 구조의 변화를 막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1789년에 삼부회가 소집되었지만, 의결 방식을 놓고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파행이 지속되자 평민 대표들은 6월 17일에 '국민의회'를 결성했습니다. 루이 16세는 회의장을 폐쇄하려 시도했고, 국민의회는 '테니스 코트 서약'으로 응수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해산을 시도했지만, 이에 반발하는 파리 시민들은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국민의회를 지지하는 무장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혁명의 희생 그리고 죽음

1793년 1월 21일, 프랑스혁명 재판에서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져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왕위계승자인 루이 샤를도 어머니와 고모에게서 떼어놓였고, 8월 1일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10월 초에는 공개 재판을 받았지만 이미 처형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혁명기의 국민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이자 역적으로 여겨 깊이 증오했습니다. 혁명의 광기는 마리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들을 끔찍하게 이간질했으며

온갖 루머와 억측으로 망가뜨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더 성숙해졌으며 그녀의 시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린아이를 협박하는 것은 쉬운 일이에요. 그 아이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적었습니다. 

1793년 10월 15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그다음 날인 10월 16일에는 남편 루이 16세 뒤를 이어 참수당해 콩코드 광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처형 당일, 특별 죄수로 거름통을 싣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이송되었으며, 품위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행에서는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는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해 칼날이 내려오는 것을 시민들이 목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녀에 대한 적개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며, 사형 전날에는 머리카락이 하룻밤만에 하얗게 세워졌다는 설도 있었지만, 과학적으로는 그런 변화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 더 성숙해진 인물

첫 번째 역사이야기로 오래전부터 관심 갖고 좋아했었던 마리앙투아네트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으로 얼룩진 역사가 근래에 재평가되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저런 오해와 편견으로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지 마리앙투아네트를 통해 돌아보게 됐습니다. 또한 언론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벼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상황과 결과를 만들 수 있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리앙투아네트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더 성숙해질 수 있는 인간의 미덕을 보게 되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