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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istorical Story 경혜공주

by 규북이 2024. 1. 18.
파란만장한 공주의 삶

 

경혜공주(敬惠公主, 1436년 ~ 1474년 1월 17일)는 조선 시대의 공주로, 문종과 현덕왕후의 딸입니다. 또한, 단종의 친누나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제한적이며, 정확한 활동이나 업적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경혜공주가 특별한 역할이나 사명을 맡았는지에 대한 기록도 부족합니다. 다만, 왕실의 혈연으로서 당시 시대상으로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누구나 공주를 꿈꾸지만 경혜공주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바뀔 거 같습니다. 

 

가장 정통성 있는 왕실의 공주

경혜공주가 태어날 당시에 아버지인 문종은 아직 즉위하기 전이었고, 어머니인 권 씨는 세자의 후궁으로 품계는 종 3품 양원(良媛)이었습니다. 문종의 아버지는 세종대왕입니다. 처음에는 '현주'로 불렸으며, 언니가 있었지만 아주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경혜공주는 군주로 승격되었고, 세자빈의 거처인 자선당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평창 군주(平昌郡主)라는 작호를 받아 정인지가 지은 영릉 묘지문에 작호명이 나타났습니다.

경혜공주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문종의 후궁출신입니다. 문종의 부인들이 여러문제로 궁에서 쫓겨나게 되자 후궁들 중에 왕비를 간택하였고 그분 현덕왕후입니다. 경혜공주의 할아버지인 세종입장에서는 조선초기왕실의 대를 잇는 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후궁이었던 경혜공주의 어머니가 왕후가 된 배경에는 "경혜공주를 낳았으니 아들을 낳을 확률이 더 높다"라고 판단한 세종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경혜공주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경혜공주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고 조유례의 집에서 유모 백씨의 손에 커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당시 공주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에  참판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과 혼인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혼인은 세종의 건강 악화와 관련이 있었는데, 세종이 승하하면 3년간 혼인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두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혼인 당시에도 경혜공주는 여전히 세자의 딸로서 군주로 불렸습니다.

이후에는 문종의 즉위로 공주로 책봉되었고, 문종은 그녀의 살림집을 양덕방(陽德坊) 향교동에 차려주었습니다. 이때에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윤면, 문여량 등이 공주와 부마를 위해 새로이 짓는 집 때문에 여러 민가가 철거된 일도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의 강남아파트 30채 이상을 헐어서 지은 것으로 훗날 경혜공주와 동생의 불운을 만든 시초이기도 합니다. 

 

문종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

문종의 승하 이후, 동생인 단종이 즉위하면서 경혜공주의 생활은 변화했습니다. 어린왕이었던 단종은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칭송하는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돌아가셨고, 아버지인 문종도 승하했습니다.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권다툼과 야심 가득한 작은아버지 세조가 있는 궁궐에서 단종은 많은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 유일하다시피 믿고 의지하면서 편하게 대화할만한 사람은 경혜공주밖에 없었습니다. 수렴청정이라도 했다면 세조가 감히 정변을 일으킬 생각은 못했겠지만, 문종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에게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왕비를 더 들이지 않았았습니다. 개인의 가정이었다면 괜찮았겠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초기조선왕실에서는 큰 혼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단종은 자주 경혜공주의 집을 찾아갔으며, 계유정난이 있던 날 밤에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세조는 측근들을 시켜서 살생부를 만들어 자신에게 반하는 세력을 하룻밤사이에 모두 죽였습니다.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은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양근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정종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다시 유배되었고, 공주가 병에 걸리자 단종은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 정종을 한양으로 불러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세조도 문종의 유일한 사위로서 정종을 잠시 도읍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간원의 상소로 정종은 다시 유배되었습니다. 이때 공주는 남편 정종의 유배지인 수원으로 향하고, 나중에 통진을 거쳐 전라도 광주까지 따라갔습니다.

이후 정종은 승려 성탄 등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거열형을 당했습니다. 이 때 경혜공주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경혜공주 역시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가산이 적몰 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 사는 삶

"저는 왕의 딸입니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제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경혜공주는 남편인 정종이 사사된 뒤에 순천 관비가 되었습니다. 이후 부사인 여자신이 무인이었지만,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주는 대청에 들어가 교의를 놓고 앉아서 여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왕의 딸입니다.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제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신다는 것입니까." 이에 여자신은 공주의 반대로 인해 부리지 못했습니다. 여자신은 나중에 벼슬을 형조 판서까지 이르렀는데, 여유길의 방조였습니다.

 

경혜공주는 남은 자식을 위해 일단 살아남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혜공주는 정종이 사사된 후에 순천 관비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안정복의 순암집에 관노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실록에는 이와는 다른 기록이 나와 있어 정확한 사실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세조는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 사람들의 가족과 집안을 풍비박산 냈습니다. 세조가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정변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왕실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주변에 신하들이 극악무도한 짓도 서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세조에게 많은 불운이 찾아옵니다. 왕세손이 죽고 치료가 불가능한 피부병이 생겼습니다. 당시 세조의 부인이던 정희왕후는 이러한 불운이 자신들의 죄라고 생각하고 절을 찾았습니다. 스님은 그런 것을 풀기 위해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야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정희왕후는 경혜공주의 아들을 몰래 도와주고 있었으며 나중에 성인이 되자 더 이상 세조에게 숨길 수 없어 이 사실을 고했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뜻을 거스른 부인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의 지난 삶을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경혜공주 역시 더이상 아들을 숨기고 키울 수가 없어 세조를 찾아갔고 세조는 경혜공주의 아들에게 정미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오래도록 잘살기를 기원했습니다. 또한 세조는 경혜공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몰수한 재산과 노비를 하사했습니다.

 

2012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된 고문서 중에는 경혜공주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한 분재기(分財記)가 있습니다. 이 부장 기는 경혜공주가 성종 5년(1474년) 음력 12월 27일에 제작된 것으로, 경혜공주가 죽을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음을 나타냅니다. 경혜공주는 1473년 12월 30일에 졸하였고, 성종은 부의로 다양한 물자를 하사했습니다. 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에 있습니다. 경혜공주는 죽기 직전에 외아들 정미수에게 남긴 분재기에서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아들이 혼인도 못한 채 홀연히 목숨이 달렸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녀는 노비들이 갑작스런 일에 낱낱이 기록할 겨를이 없어 미리 집과 통진에 있는 전답을 아들에게 주며, 죽은 뒤에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자손에게 전하며 오래도록 기리길 바랐습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통속에서도 살아남아 자식을 키운 경혜공주

 

가장 정통성있는 왕실에서 공주로 태어나 누구보다도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작은아버지가

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탈취하고 자신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유배 보내거나 좌천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유일한 친동생인 단종과 남편인 정종마저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할아버지 세종이나 아버지 단종, 그리고 경혜공주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저러한 일들을 예측조차 못했을 겁니다. 근래에 들어 돈에 대한 사람들의 욕심이 맹신적일 정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돈과 권력 앞에서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마저도 가볍게 저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조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모든 걸 죽이고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이가 들고 주변을 돌아보니 자신이 지나온 삶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세조의 여러 가지 병은 유전적인 것과 환경적인 것도 있겠지만, 정서적인 것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무 죄책 감 없이 죽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조는 유교사회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의 윤리적 책임을 나이 들어 느끼지 않았을까요. 제가 경혜공주라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 어려웠을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공주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은 것입니다. 작은아버지를 얼마나 죽이고 싶었을지 그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식을 위해 그녀는

과거를 묻어두고 화해의 물꼬를 튼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하다는 말을 그녀를 통해 되돌아봅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