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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istorical Story 김만덕

by 규북이 2024. 1. 18.
"제주도에 대기근이 들자 전재산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한 여인"

 

김만덕(1739년~1812년)은 조선 시대의 상인으로, 제주도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을 때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가져온 쌀을 모두 기부했습니다. 이로써 제주도의 가난한 주민들을 돕고, 그녀는 제주에서 의녀(義女) 김만덕으로 알려졌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분인 김만덕에 대해 알아봅시다.    

 

힘겨운 어린시절과 장사

김만덕은 제주 성내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12세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아가 살기 어려운 시절인데, 조선시대에 부모의 죽음은 매우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어린 시절에는 친척 집에서 힘들게 살다가 나이 든 기녀의 집에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된 후, 기녀의 직업에 대해 알게 되고,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양인으로 환원되도록 탄원했습니다. 

양인이 된 김만덕은 객주를 차리고 제주의 특산물인 귤, 미역, 말총, 양태 등을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했습니다. 18세기 조선의 시대 변화에서는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업도 함께 발전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며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켰습니다.

하지만 김만덕은 여전히 소박한 삶을 추구하며 돈을 벌었지만 검소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녀는 편안한 삶은 하늘의 은덕이라고 믿어 자신의 부를 나누고 빈민을 도와주는 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전재산으로 백성을 구제

1793년, 제주도에서는 세 고을에서만 6백여 명이나 아사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흉년이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2만 섬의 구호 식량을 보내려 했지만, 1795년에는 수송 선박 다섯 척이 침몰하여 구호 정책이 실패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김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5백여 석의 쌀을 구입해 왔습니다. 그중 45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을 구제했습니다. 2 만섬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어려운 시기에 가진 재산을 전부 팔아가면서 누군가를 돕는 일은 현대사회에서도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행동으로 인해 김만덕은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정조에게 알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김만덕을 칭찬하며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를 내어 기아자 천백여 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하다."라고 말했습니다. 1796년에는 정조가 김만덕의 소원을 듣고 규칙을 깨고 제주도민이 섬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로 인해 김만덕은 이례적으로 제주 여성 중에서는 유일하게 한양을 밟아본 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출신 지역에 따른 제한 때문에 이러한 일은 매우 특이한 사건으로 취급되었고,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죽음이후에도 나눔을 실천

채제공, 정약용, 김정희, 조수삼과 같은 당대의 지식인과 문인들은 김만덕의 구휼 사업을 칭송하며 그녀의 생애를 다뤄 글을 남겼습니다. 김만덕은 금강산 유람을 마친 후에도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양아들을 입양하여 키웠습니다.

1812년, 고향인 제주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으로는 양아들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지금 시대에서 생각하더라도 놀라운 결정입니다. 1840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의 양자 김종주에게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졌다.'는 뜻의 '은광연세'라는 편액을 주어 김만덕의 은덕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로써 김만덕은 그녀의 삶을 통해 빈민 도움에 큰 헌신을 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김만덕 이야기

김만덕은 황진이나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같은 다른 조선시대 여성들만큼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혼자서 사업을 시작하여 부자가 되었으며, 대인배적인 업적까지 갖추어져 전근대의 한계를 극복한 '자수성가한 여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1976년에는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 경내에 김만덕기념관이 설립되었고, 1980년부터는 매년 탐라문화제 개최일에 맞추어 만덕제라는 제사가 지내지고 있습니다. 2004년에는 김만덕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국내외 소외 계층에 대한 지원과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1977년에 방영된 MBC 일일드라마 '정화'를 통해 김만덕은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9월에 출생지에 대한 연구 결과, 현재의 이도동이 김만덕의 출생지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연구는 김만덕 당대 사료와 후대 사료, 그리고 후손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여, 출생지를 "제주성 안"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제주도 김만덕 기념관

김만덕기념관은 도전과 나눔을 실천한 김만덕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곳으로, 그녀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지어진 나라 최초의 나눔 문화전시관입니다. 김만덕의 봉사와 헌신의 정신을 통해 도전과 나눔의 가치를 강조하며, 방문객들에게 교육적이고 영감을 주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김만덕의 유산을 계승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김만덕의 삶과 사업, 나눔 정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사회적 책임과 나눔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제주방문했을 때 다녀오시는 걸 추천드려요 :)

 

http://www.mandukmuseum.or.kr/

 

김만덕기념관

전세계 최초 나눔문화 기념관 은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지다

www.mandukmuseum.or.kr

 

"김만덕은 김만덕이다"

 

김만덕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뤄보았습니다. 김만덕이라는 인물을 동서양에서 기록되거나 구전되어 오는 역사적 인물과 비교했을 때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 같습니다.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고민이 들 때 멘토이자 스승으로 삶을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비춰봤을 때 당대 지식인들마저 칭송했던 그녀의 업적은 현대사회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여자, 제주도민, 상인이라는 여러 가지 이유는 당시로서는 결코 좋은 이점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초기에는 고려시대처럼 여자들에게 제사에 대한 권한과 재산분배도 적절히 해주었지만 중기와 후기로 갈수록 남존여비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악습은 모두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인들은 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았고, 훗날 일본으로 넘어가 재일교포가 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상인도 농업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사회에서는 천대받았습니다.

 

하지만 김만덕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얻은 부를 자신을 차별하던 시대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김만덕 같은 인물이 한국사회에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제주도에는 김만덕 기념사업회가 존재하고 오늘날까지도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만덕이라는 인물이 더 많이 알려져서 한국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실천되기를 바라고 저 또한 노력해야겠습니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